신앙고백서들의 목적
벨뷰한인장로교회는 신앙고백서 가운데 있는 신조와 고백들을 통해서 그 신앙을 선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합니다. 벨뷰한인장로교회는 이러한 신앙고백들을 통하여 교인과 세상을 향해, 이 교회는 누구이며, 무엇을 믿으며, 무슨 일을 하려고 결심하는가를 선언합니다. 이 고백들은 이 교회가 어떤 확신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인지 그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줍니다. 이 신앙 고백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지침서이고, 개혁 기독교 전통의 본질을 요약해 주며, 교회가 건전한 교리를 유지하도록 지도해 주고, 복음 선포의 사역을 위하여 교회를 준비시켜줍니다. 이 고백들은 개인적인 헌신과 신자들의 공동체의 삶과 증거를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신앙고백서 안에 있는 신조들과, 신앙 고백들과, 요리 문답들은 역사적이면서 또한 동시대적입니다. 그 각각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상황에 반응하여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신앙 고백 문서들은 그들의 역사적 특성에 유념하면서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현재의 신학적, 윤리적, 혹은 언어적 기준에 맞추어 변형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 고백서 안의 신앙 고백들은 과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교회가 과거에 어떠했으며, 무엇을 믿었으며, 무엇을 하기로 결의했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고백 문서들은 동시대적 확신과 행동들을 천명하면서, 교회의 현재적 신앙과 생활을 다룹니다.
니케아 신경 THE NICENE CREED
1.1
우리는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셔서, 하늘과 땅과, 이 세상의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지으셨습니다.
1.2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모든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나님에게서 나신 참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는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 말미암아 몸을 입으시고,
참사람이 되셨으며, 우리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 형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묻히셨으나, 성서의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1.3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는 한 세례를 믿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올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아멘.
참고
처음 3 세기 동안은 교회는 적대적 hostile인 환경 속에 있었다. 한편으로는 히브리적, 유대-기독교적 맥락 속에서 발전된 복음의 언어를 헬라-로마 세계와 연결시켜야 하는 도전을 받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박해로 인하여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성경적 증언과 상치되는 사상들로 인해서 위협을 받기도 했다.
312 년에 콘스탄틴 Constantine 은 밀비안 브리지 Milvian Bridge 전투에서 로마제국을 장악했다. 그는 그의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개입 때문이라고 본 나머지 기독교를 그의 제국에서 특혜적 favored 위치로 승격시켰다.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신앙, 한 교회, 한 제국, 한 황제”가 그의 표어가 되었다.
이 새황제는 “한 신앙과 한 교회”가 신학적 논란 때문에 깨어졌다는 것을 곧 발견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오랫동안 논점이 되어 서로 상충함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인 아리우스는 신적인 그리스도, 만물을 존재케 하신 “말씀”이신 그분은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격은 하나님의 신격과 유사하되 동질 same essence은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 알렉산더는 그의 동료이자 후계자인 아타나시우스와 더불어 아리우스를 반대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즉 아들의 신격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신격과 동일한 실체라고 주장했다. 이와 다르게 주장하는 것은 다신론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이 궁극적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고 그들은 말했다.
교회 안에서 점점 넓어지는 균열을 막기 위해서 콘스탄틴은 325 년에 니케아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을 반영하는 신경을 작성하였고, 감독들의 대다수가 이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두 파는 논쟁을 계속했다. 381 년에 두 번째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였으며, 그 회의에서 325 년 신경을 개정하고 확장하여 채택했다. 그것이 바로 니케아 신경이다.
니케아 신경은 가장 에큐메니칼한 신경이다. 서방 교회들은 동방 정교회와는 달리,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원 proceeds 하실 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 (라틴어로 filioque) 로부터 발원하신다고 주장한다. 동방 교회들에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 두분으로부터 발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 인격 person의 고유성을 위협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서방교회들에게는 filioque 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를 수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문제는 에큐메니칼 대화에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사도 신경 THE APOSTLES’ CREED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참고 번역>
1.1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1.2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1.3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참고>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쓴 것은 아니지만, 제 1 세기 교회의 신학이 어떠했는지를 반영해 준다. 사도신경의 구조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만민을 제자로 삼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 명령에 기초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문맹이었을 때에는, 주기도문 및 십계명과 더불어 사도신경을 구두로 반복하는 일이 서방교회의 신앙을 보존하고 전수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동방 정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에서는 크리스천들이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했지만, 그의 주 되심에 대한 성경적 맥락을 언제나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제 2 세기에 로마에 살던 마르시온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교회의 이해를 한층 더 위협하였다. 마르시온은 구약성경을 불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신 포악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와 대조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계시해주었다고 믿었다. 마르시온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된 메시아가 아니었고, 구약성경은 성경이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 “성경”을 누가복음(예수탄생 이야기와, 그의 생각에 유대적 사상을 표현했다고 보이는 다른 부분들을 삭제한 내용)과 , 그가 반유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바울서신들로 국한할 것을 제안했다. 마르시온의 견해는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하여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A.D. 180 년경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마르시온을 반박하기 위하여 사도신경의 초기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창조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고,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으며,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고, 하늘에 오르셨으며, 거기서 성부와 함께 통치하신다는 것을 확언하였다. 그들은 또한 성령, 교회,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긍정하였다.
교회의 교인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장기간의 도덕 및 교리적 교육을 받은 후 세례 시에 자기들이 믿는 바를 진술하도록 요구 받았다. 그들은 이 신경에 있는 말씀들로 그 질문에 대답하였다.
사도신경이 좀 더 발전되는 과정이 있었다. 제2 세기와 제3 세기의 박해 기간에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응하기 위하여 교회는 “나는 죄의 용서를 믿습니다”라는 조항을 첨가했다.
제 4 세기와 제 5 세기에는 북아프리카의 크리스천들이, 교회란 소수의 영웅적 사람들로 구성된 배타적인 분파인가, 아니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포괄적인 교회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토론한 나머지 마침내 “거룩한” (하나님께 속한)이라는 말과 “보편적인 universal”(만유의)이라는 말을 첨가하기에 이르렀다. 제 8세기에 비로서 사도신경이 오늘날과 같은 문구로 완성되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일명, the Scots Confession of 1560로 불리우는)는 1560년에 스코틀랜드의 6명의 종교개혁자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아버지인 John Knox를 비롯하여 다섯 명의 Johns(John Winram, John Spottiswoode, John Wilock, John Douglas, John Row)였다. 한편 이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John Knox의 공헌을 기려, 흔히 ‘John Knox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코틀랜드 국회는 이 고백서를 승인하였으나 메리 여왕(Queen Mary)의 반대로 1567년까지 법적으로 공포되지 못했다. 하지만 1648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어 장로교회 표준문서로 대체되기까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첫번째 종속 신앙고백서(the first Subordinate Standard)로서 인식되었다.
1648년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가 영국의 칼빈주의자들과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국회에서 정식으로 공인하여 전국 교회에 시달하여 표준적인 신앙고백으로 삼게 된 후로 낙스의 이 신앙고백은 종전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으나 이것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신학과 신앙을 잘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결하면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복음의 설교와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에다가 교회적인 권징을 첨가한 것은 칼빈주의 교회의 특징을 잘 살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560년에 작성된 이 신앙고백을 제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1580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트랜트 회의 결정들을 반박하면서 신앙고백을 발표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것은 간단하였으나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제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제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을 소개한다.
제1조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또 인정하며 그에게만 의뢰하며 섬기며 그만을 예배하며 그만을 믿는다. 하나님은 영원, 무한, 불가해, 전능 및 불가시하신 분이며,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로 구별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이 천지에 있는 모든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부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측량할 수 없는 섭리로써 지배하시며, 그 자신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나님은 만물을 그의 영원한 지혜, 선, 정의로 정하신 것을 고백한다(창1:1; 행17:28; 잠16:4).
제2조 인간의 창조에 관하여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고백하며 또 인정한다. 즉 그는 우리의 시조 아담을 자기의 형상을 닮게 지으시고 그에게 지혜와 주권과 정의와 자유의지와 자기자신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주셔서 사람의 본성 안에 불완전한 것이 없게 하셨다(창 1:26,27,28 ; 골 3:10 ; 엡 4:24). 이 영광과 완전에 위배되게 남자와 여자가 다같이 타락하였다. 여자는 뱀 때문에 타락하였고 남자는 여자의 말에 따라 타락하였다. 아무튼 말씀으로 금단의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분명히 위협하셨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존엄에 반역하게 되었다(창 3:6 ; 2:17).
제3조 원죄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원죄라고 불리는 죄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손되어 인간과 그 후손은 하나님에 대적하는 자, 즉 사탄의 노예로서 죄악에 봉사하는 자가 되었다(시 51:5 ; 롬 5:10 ; 7:5 : 딤후 2:26 ; 엡 2:1,2,3). 그 결과 영원한 사망이 위로부터 중생하지 못하였던 자, 또 현재 중생하지 못한 자와 또 장래에도 중생하지 못할 자들을 지배하며 주관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의 마음 속에 그의 말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창조하심으로 우리를 중생시키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과 은사들을 굳게 붙잡는다(롬 5:14 ; 6:23 ; 요 3:5 ; 롬 5:1 ; 빌 1:29).
제4조 약속의 계시에 관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그에게 대한 복종으로부터 무섭게 타락한 후 다시 아담을 찾아 그의 이름을 불러 그의 죄를 책망하시고 죄를 선고하시고 마지막에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다”는 기쁜 약속을, 즉 그 후손이 악마의 일을 타파하리라는 약속을 그에게 주셨음을 우리는 믿는다. 이 약속은 종종 반복되었고 차차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쁨에 넘친, 믿음이 돈독한 신자들이 부단히 이 약속을 이어받고 믿어 온 것이었다. 즉 아담으로부터 노아에게,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에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에 이르기까지 율법 아래서 믿음이 독실한 선조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기쁜 날을 바라보고 기쁨에 넘쳤었다(창 3:9 ; 3:15 ; 12:3 ; 15:5,6 ; 삼하 7:14 ; 사 7:14; 9:6; 학 2:7,9; 요 8:56).
제5조 교회의 지속과 증가와 보존에 관하여
우리는 항상 하나님은 아담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실 때까지 모든 시대에 있어서 그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인도하시고 증가시키기고 교회에 영예를 주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셨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고국으로부터 불러내셔서 그를 인도하시고 그의 자손을 번성케 하셨다.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그를 지키시고 바로의 노예와 억압에서 구하셨고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과 제도와 의식을 주셨다. 또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고 판관들 시대를 거쳐서 사울 다음에 왕으로서 다윗을 주셨고 그의 자손에게서 나온 한 사람이 영원히 왕좌를 차지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계속 예언자를 보내셔서 그들이 우상숭배에 기울어졌을 때 하나님의 정도(正道)에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완고하여 정의를 경멸하였으므로 그들을 적군의 손에 넘기셨다. 옛날 모세의 입으로 위협을 받은 대로 거룩한 도성이 파괴되고 궁전은 불타고 모든 땅은 70년간 황폐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써 다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내셨고 도성과 궁전이 재건되었다. 그러나 약속에 따라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그들은 사탄의 온갖 유혹과 공격을 참고 견디었다.
제6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하여
때가 차서 하나님은 성자, 곧 영원한 지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본체이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성자는 성령의 역사로 여자 곧 처녀의 본질에서 인간성을 취하셨다. 이렇게 하여 다윗의 후손, 하나님의 약속의 천사, 약속된 메시아가 탄생하셨다. 우리는 그를 임마누엘, 즉 하나님과 사람의 두 완전한 본성이 한 품격으로 통일되어 결합된 참 하나님, 참 사람으로 고백하고 인정하였다. 우리는 이 고백에 따라 아리우스, 마르키온, 유티케스, 네스토리우스를 배격될 해로운 이단으로서 벌하였고, 또 그의 신성의 영원성을 부인하거나 인간성의 진실성을 부인하거나 그 두 가지 본성을 혼합하거나 분리시키는 사람들을 벌하는 것이다.
제7조 왜 중보자, 화해자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어야 하는가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신성과 인간성 사이의 신성한 결합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뜻에 따라 된 것이며 우리의 모든 구원은 여기서 생기며 그것에 의존하는 것으로 믿는다.
제8조 선택에 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영원하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창세 이전부터 그를 우리의 머리로 삼으시고 또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 영혼의 위대한 감독으로 정하셨다. 하나님의 정의와 우리의 죄의 적대관계 때문에 육적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에게 능히 이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자진하여 우리의 몸과 살과 뼈를 취하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와 화해자가 되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그가 친히 다음과 같이 증거 하셨다.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나님이며 너희의 하나님이신 분에게 올라간다”고. 아담 안에서 우리가 가졌던 가장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다시 우리에게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므로 멸망할 우리와 같이 계실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우리의 형제가 되도록 우리에게 주셨고 이미 말한 대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그를 인정할 때 받을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다.
또 구주, 속죄주, 참 하나님, 참 사람이 되는 것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지셔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야만 되었고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친히 나타나서 우리의 인간성에 따라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고 그의 죽음으로써 사망의 창시자를 정복하고 승리해야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일하신 하나님은 죽음을 당할 수 없고 또 인간성만으로는 사망을 정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두 본성을 하나의 품격으로 결합시키신 것이다. 한 쪽은 죄 때문에 우리가 받을 사망의 약점이고, 다른 쪽은 무한한 능력, 즉 사망을 정복하시고 우리에게 생명, 자유, 영원한 생명을 획득해 주신 신성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결코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제9조 그리스도의 죽음, 고난, 그리고 장사에 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진하야 희생물로서 그의 어버지에게 바쳐 죄인의 고뇌를 경험하시고 우리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죄 없는 어린 양으로서 세상의 심판에 따라 정죄 되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저주를 받고 십자가 위에서 잔인한 죽음의 고통을 받으신 것만이 아니고 그는 죄인이 당연히 받아야할 아버지의 진노를 일시적으로 받아 고통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몸과 영혼으로 고통을 당하시고 사람들의 죄를 위한 완전한 변상을 치르신 그 고난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이었음을 확신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한 다른 희생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죄의 용서와 변상을 그의 죽음으로 우리가 영원히 획득한 것임을 우리가 확신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제10조 부활에 관하여
우리는 의심 없이 다음과 같이 믿는다. 즉 사망의 슬픔이 생명의 창시자를 속박할 수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 매장되어 음부에 내려가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시고 사망의 창시자를 정복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망과 사망의 속박을 이긴 것이다. 우리의 구주의 부활이 실로 그의 원수의 증거에 의하여 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남으로써 또 예루살렘 거리에 많은 사람이 나타난 것으로써 확증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것은 천사의 증거와 사도들과 그리고 회개한 사람들로서 구주의 부활 후에 그들과 같이 먹고 마신 사람들의 증언으로 확증되었다.
제11조 승천에 관하여
우리는 처녀에게서 나서 십자가에 달려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몸이 모든 것의 성취를 위하여 승천하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 주님은 우리의 이름과 위로를 위하여 천지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 또 주님은 아버지 우편에 앉아서 그의 나라에서 왕으로 취임하셨고 우리를 위해서는 변호사이시며 유일한 중보자 이시다. 형제들 가운데서 주님만이 영광과 존귀와 특권을 소유하시다가 마침내 그의 모든 원수들이 그의 발을 올려놓는 대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 원수들이 최후의 심판을 받을 것으로 확신한다. 또 그 심판의 집행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승천하신 모습으로 눈으로 보이게 재림하실 것을 믿으며 그때 모든 사람들이 새로 회복되어 의를 위하여 학대와 굴욕과 악에 시달려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약속된 축복의 불멸의 생명을 이어받을 것을 믿는다.
그러나 반대로 강팍하고 불순종하고 잔인한 박해자들과 더럽혀진 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여러 가지 불신하는 자들은 완전한 암흑 속에 던짐 받을 것인데 거기서는 구더기는 죽지 않을 것이며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날과 그날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다만 우리의 욕망을 억제하는 한가지 구속일 뿐 아니라 무한한 위로가 된다. 이것으로 세상의 왕들의 위협과 현세의 위험과 죽음의 공포도 우리를 우리의 머리이신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의 결사를 포기하게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약속의 메시아, 변호자, 중보자 임을 고백하고 확신한다. 주님의 영예와 직책에 맞서서 사람이나 혹은 천사가 스스로 교만을 부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자이시며 최고의 지배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으로 보고 그들을 혐오할 것이다.
제12조 성령의 신앙에 관하여
우리의 이 신앙과 신앙의 확신은 육과 혈, 즉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자연의 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 성령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성령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그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 성령 없이는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원수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 그대로는 죽는 자이며 눈이 어두우며 강팍하기 때문에 만일 주 예수의 성령이 죽은 자를 되살리시며 우리 마음에서 암흑을 제거하시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복종하도록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쳐부수지 않으시면 우리는 찔려도 느끼지 못하며 빛이 드러나도 보지 못하며 계시되어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부 하나님이 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속량 하시게 하셨다고 위는 고백한다. 이처럼 우리는 또한 성령이 우리의 중생 이전이든 이후이든 간에 우리에게서 나오는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를 성화 시키시고 중생 시켰음을 고백한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창조와 속죄의 존귀와 영광을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처럼 중생과 성화를 위해서도 그 어떤 영광이나 영예도 쾌히 포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선량한 생각을 한 가지도 못하며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의 과분한 은혜의 영광과 찬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제13조 선한 행위의 원인에 관하여
선한 행위의 원인에 관하여 우리는 그것이 자유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 에수 그리스도의 영에 있다고 고백한다. 그의 영은 참된 믿음에 의하여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살며 우리가 그 안에서 걷도록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대로 선한 일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화의 영이 없는 사람에게도 그리스도가 그 마음 안에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우리는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살일, 억압자, 잔인한 박해자, 불륜한 자, 불신앙자, 우상숭배자, 술 취하는 자, 도둑질 하는자, 불의를 행하는 자는 참된 신앙을 갖지 않으며, 그들이 악을 계속하여 행하는 한 예수의 영을 절대로 갖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녀들이 참된 신앙으로 받는 주 예수의 영은 모든 사람의 마음의 소유가 되어서 그들을 새로 지으신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에 사랑했던 것을 미워하고 전에 미워했던 것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영과 육 사이의 영원한 투쟁이 벌어진다. 그것은 육적이며 자연적 인간이 자기 자신의 타락으로 스스로 쾌락과 향락에 도취하여 고난을 당할 때는 불평을 품으며, 번영할 때는 의기양양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존엄을 파손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우리의 영혼에서 증거 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우리는 불순한 쾌락에 저항하며, 이 타락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여 마침내 우리의 죽어야 할 몸에서 왕 노릇 못하게 죄를 정복한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의 사람에게는 이러한 투쟁이 없고 탐욕을 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악마처럼 죄를 따른다. 또 그들의 타락한 욕망이 그들을 부패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위에서 말한 대로 죄와 싸우며 불의에 유혹되었음을 알면 크게 슬퍼한다 . 만일 그들이 넘어지면 열심히 회개하여 다시 일어난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자기 자신들의 힘으로 행하지 않고 주 예수의 힘으로 한다 . 주 예수 없이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다.
제14조 어떠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 선한 것으로 인정되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한 율법을 사람에게 주셔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존엄에 반역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실 뿐더러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보답하여주시기로 약속하신 모든 일을 행하도록 명령하셨다고 고백한다 . 또 그러한 행위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 다른 하나는 이웃 삶을 위하여 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둘을 하나님의 계시히신 뜻에 따라 확신하는 바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우리의 모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아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성례전을 통한 교제를 가지는 일은 십계명의 첫째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행위이다 . 부모, 왕후, 지배자, 위에 있는 권위를 존경하는 일, 그들을 사랑하고 도우며, 또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남이 없이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며, 죄 없는 생명을 도우며, 억압자를 진압하며, 압박하는 자를 막으며,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가지며 진실과 절제로써 생활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말과 행위에 있어서 올바르게 행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이웃 사람을 해치려는 욕망을 억제하는 일, 이러한 것은 십계명 둘째 부분에 기록된 선한 행위일뿐더러 그런 일은 그들이 스스로 행해야 할 일로써 명령된 것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들이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은 가장 혐오할 죄이며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며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일이다. 즉 우리가 필요할 때 하나님만은 불러 구하는 일을 하지 않고, 또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말씀을 경멸하는 일, 우상을 갖는 일, 혹은 그 것을 예배하고 우상숭배를 지키며 그것을 변호하는 일, 하나님의 존귀한 이름을 생각하는 일이 적은 일, 예수 그리스도의 성례전을 더럽히며 남용하며 경시하는 일, 살인하거나 혹은 그 일에 동의하며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며, 우리가 그 일을 반대할 때 피를 흘리게 하겠다고 말하는 일, 마지막으로, 첫째와 둘째 부분 이외의 다른 어떤 계명이라도 범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하고 확신한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와 불만이 오만하고 감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불붙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로서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신앙을 가지고 행하는 행위만이 선한 행위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반대로, 악한 행위는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게 행하는 일일뿐더러 신앙과 하나님 예배에 있어서 단순히 인간적인 발견과 고안 이외에 아무런 확신도 없이 행하는 일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이러한 일을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시고 거부하신 것이다.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제15조 율법의 완전과 인간의 불완전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가장 올바르고 가장 신성하고 가장 공정하고 가장 완전하며 또 가장 완전하게 지켜지도록 명령된 것이며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으로 고백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의 성질은 타락하여 극히 약하고 불완전하여 우리는 결코 완전하게 율법의 행위를 완수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중생 한 후에도 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며 속죄의 주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는 율법의 마지막이며 완성이시다. 그의 공로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고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지만은 하나님의 저주는 우리 위에 내리지 않는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비춰서 우리를 보시며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을 완전한 것으로 간주하시고 받아들이시고 성자의 의를 가지고 많은 허물을 가진 우리의 행위를 가리워주신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율법에 복종할 의무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고 오직 인간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만이 율법이 요구하는 율법에 대한 복종이 요청되는 것이며 또 지금도, 또 장래에도 요청 될 것이다(율법 제3용법).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행했을 때 겸손하게 무익한 종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행위의 공적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공적을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헛된 것을 자랑하며 저주받을 우상숭배에 신뢰하는 것이다.
제16조 교회에 관하여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한 하나님을 믿듯이, 처음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고 또 세상 끝날에도 있을 하나의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으로 예배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의 하나의 공동체를 믿는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시며 교회는 또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며 신부이다. 이 교회는 가톨릭, 즉 보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나라, 모든 국민, 유대인, 이방인을 막론하고 말이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성자 그리스도 예수와 교제하며 성령의 성화가 이뤄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교제가 아니고 성도의 교제라고 불린다. 교회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시민으로서, 측량할 수 없는 이익의 열매, 즉 한 하나님, 한 주 예수, 한 신앙, 한 세례를 가진 이 교회 밖에는 생명이 없고 영원한 행복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것을 모독하는 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며, 공평과 정의에 따라 사는 사람들, 또 고백하는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그리스도 예수 없이는 생명도 구원도 없다.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 예수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 아니고는 아무도 교회에 속할 수 없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온 사람들이 그의 교리를 고백하고 그를 믿는다. 우리는 신앙이 독실한 부모와 함께 그들의 아이들을 이해하게 된다.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만이 교회를 알고 있다. 또 교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선택된 사람들도 포함한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승리의 교회라고 부르며 죄와 악마에 대항하여 싸우며 앞으로 세상에 살 사람들도 포함한다.
제17조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선택된 사람들로서 죽은 사람은 그의 노고로부터 풀려서 평안과 휴식을 얻는다. 그들은 어떤 환상가가 주장하듯이 자는 것도 아니고 또는 망각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공포, 고통 및 유혹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하여 승리의 교회의 이름을 지니게 된다. 반대로 악하며 불신앙한 자들로서 죽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받는다. 그들이 기쁨과 고통을 느끼지 않는 잠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누가복음 16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와 강도에 대한 그의 말씀과 제단 아래서 울부짓는 영혼이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주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습니까?”고 증거 하는 말에서 밝혀진다.
제18조 무엇으로 참된 교회는 거짓된 교회와 구별되며, 교회의 교의의 바른 판단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사탄은 처음부터 해로운 유대인 회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장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잔인한 살해자의 마음을 불붙여서 참된 교회와 그 회원들을 박해하여 괴로움을 더하게 하였다. 그것은 마치 가인이 아벨에게, 이스마엘이 이삭을, 에서가 야곱을, 그리고 유대인의 사제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그 후의 사도들에게 행한 일과 같다. 가장 필요한 것은 참된 교회가 분명하고 완전한 징표에 의하여 추악한 회당과 구별되어서 우리가 어떤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용납할 때 스스로 속여서 우리 자신이 정죄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정결한 신부가 무서운 창부, 즉 악의가 찬 교회를 식별할 수 있는 징표와 증거는 결단코 역사가 오래 된데 달리지 않으며 또 잘못된 칭호에 달린 것도 아니며 또 영원한 감독직의 세습에 달린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약속된 지위에 달린 것도 아니고 또 어떤 한가지 과오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수에 달린 것도 아니다.
가인은 나이와 지위로서는 아벨과 셋을 능가하였다. 예루살렘은 지구상의 모든 장소를 능가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는 또한 사제가 아론으로부터 이어져 있었다. 또 많은 사람이 학자와 바리세인들과 사제들에게 복종하고 있었고 또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교훈도 믿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깊이 생각하는 사람도 전날에 한때 이름이 붙었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교회였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설교라고 우리는 고백하며 확신한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책이 진술하듯이 하나님은 자기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이다. 이것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결합되어서 마음에 그것을 새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훈련이 올바로 시행되며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으로 악덕이 억제되고 선행이 육성되는 것이다(권징). 이러한 징조가 보이고 어떤 때이든 두 세 사람의 소수가 아니고 많은 사람이 그 규정을 지키는 곳에는 의심할 것 없이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약속대로 그들의 교회 안에 계신다. 앞에서 말한 바 세계 교회만이 아니고 특히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을 전파하여 심은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및 그 밖의 장소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린다. 우리는 스코틀란드 왕국에서 참된 신앙으로 예배를 드리는 거리와 도시와 그 밖의 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교회를 가질 것을 권한다. 우리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의는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과 신약성경, 즉 교회가 고대로부터 항상 경전으로서 가지고 있던 책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 책 안에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믿어야 할 모든 것이 충분히 나타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성경의 해석은 결단코 개인의 힘이나 공작 인물의 힘이나 교회의 힘에 따라서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어떠한 인격과 지위의 우월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영에 달린 것이다. 성경의 해석과 의미에 관하여서 또 어떤 부분과 어떤 문장에 대한 남용을 시정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에서 논쟁이 생길 때 성령이 성경 안에서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우리 이전의 사람들이 말하거나 행한 것을 중요시해서는 안 된다. 통일성을 지닌 성령이신 하나님의 영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같이 고백하는 바이다. 만일 어떤 교사나 교회나 회의의 해석과 결정과 고시가 있더라도 성경에 쓰인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면 비록 회의나 왕국이나 국민이 그것을 인정하고 용납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참된 해석과 의미가 아님이 분명하다. 우리의 신앙의 근본적인 점과 성경의 본문에 위반되는 해석을 받아들이거나 동의해서는 안 된다.
제19조 성경의 권위에 관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경이 충분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바대로 성경의 권위는 다만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사람이나 천사에 달린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에서 받아들인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권위도 갖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며 참된 교회를 해치는 것으로 확신한다. 참된 교회는 항상 교회의 신랑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이며 스스로 주인이 되어 그 음성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제20조 총회와 그 힘과 권위 및 총회의 소집의 이유에 관하여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이 정식으로 소집된 총회에 모여 우리에게 제안된 것을 경솔한 비난을 받지 않도록 올바른 조사도 없이 총회라는 이름 아래서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사람이므로 중요한 일에 있어서도 과오를 범할 수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 회의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어진 결정과 명령을 선언하는 한 우리는 그 회의를 존중하고 승인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총회의 이름 아래서 새로운 신조의 작성을 주장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게 조직이나 교의의 작성을 주장한다면 우리의 영혼을 유일하신 하나님의 음성에서 떠나서 인간의 교의와 조직에 복종시키는 악마의 교의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거부한다. 총회를 소집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전에 주시지 않으신 영원한 율법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며 또 새로운 신조를 만들거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도 아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말씀의 해석에 의하여 그가 전에 원하시지 않았던 것이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시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기 위함도 결코 아니다(회의의 명목에 부합되기 위하여)
회의의 이유는 한편으로는 이교도를 논박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회원들의 신앙고백을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의하여 행하는 것이며 총회가 하는 일은 과오가 없다는 의견이나 특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총회의 주된 이유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 밖의 이유는 선량한 정치를 위한 것이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집에서처럼 모든 것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정치와 의식도 그것이 모든 시대와 장소를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은 사람들이 계획한 것이고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교회를 교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신을 품게 하는 때는 그것을 변경해도 좋으며 또 변경시켜야 한다.
제21조 성례전에 관하여
성부는 율법 아래서 희생의 사실 외에 두 가지 주요 예전을 두셨다. 즉 할례와 유월절이다. 그리고 이것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와 같이 복음의 시대에도 두 가지 성례전이 있음을 믿고 인정한다. 그것은 주 예수가 제정하신 것이고 주님의 몸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행하도록 명령하셨다. 즉 세례의식과 성찬예식, 곧 주님의 몸과 피의 교제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옛 계약의 성례전과 같이 새 계약의 새 계약의 성례전은 단지 주님의 백성과 주님의 계약을 갖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신앙의 권장과 성례전에 참여함으로서 그의 마음에 주님의 약속의 확신을 주며 선택된 자들이 자기들의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 예수 와 같이 갖는 결합, 일치 및 교제의 확신을 마음에 새기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례전은 보이는 표지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공허한 고백을 배격한다. 우리는 세례의식에 의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연결되어 주님의 의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그것으로써 우리의 죄가 가리워지고 용서된 것을 확신한다 . 또 바로 집행된 성찬의식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와 결합되고 주님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된다. 우리는 교황이 해로운 것을 가르치고 또 저주받을 것을 믿고 있듯이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가 진짜 피로 실체의 변화가 이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성례전을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몸과 피에 의하여 주어지는 실제적인 일치와 결합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이 성령은 우리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고, 육신적이고, 지상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 우리를 위하여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시고 이제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과 피와 실제로 연합한다.
하늘에 계셔서 영광 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몸과 땅 위에서 죽을 우리들 사이의 무한한 간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떼는 빵이 그리스도 몸과의 교제이며 우리가 마시는 잔은 그와 피와의 교제임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이 독실한 사람이 주님의 성찬을 올바로 받음으로써 주 예수의 몸을 참으로 먹고 그의 피를 참으로 마시며 이 일을 통하여 주님은 그들 안에 계시고 그들은 주님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확신한다. 살은 바로 주님의 살이 되고 뼈는 주님의 뼈가 된다. 그리하여 영원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몸 자체의 조건과 성질은 멸하여 썩어질 것)에다가 생명과 영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써 우리에게도 동일한 특전을 주셨다.
그것은 단순히 일시적으로 주시는 것도 아니다.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이 주님의 성만찬을 올바로 받을 때 자연적인 인간이 알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신비한 결합을 가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신앙이 착실한 사람도 태만과 인간적인 약함 때문에 주님의 성찬을 받는 그 순간에도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이익도 얻지 못하지만 옥토에 뿌려져 살아 있는 씨처럼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주 예수의 올바른 제도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령은 신비한 역사의 열매인 신앙을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 이 모든 것은 성례전이 우리에게 유효한 것이 되게 하신 유일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참된 신앙에서 오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므로 성례전이 단순한 표지라고 우리가 확언하거나 확신한다고 욕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모욕하며 분명한 진리에 위배되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성례전의 표지인 여러 가지 원소들 사이에는 한 가지 구별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지가 의미하는 실체 대신에 그 표지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표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표지의 원소들을 무용한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우리 자신들을 열심히 살펴본 후 경건하게 그것들을 사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도가 다음과 같이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게 된다”.
제22조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에 관하여
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요한 일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첫째는 말씀의 설교를 위하여 지정된 사람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즉 올바른 교사가 이것을 집행 할 일이다. 하나님은 이 교사의 입에 권고의 설교를 넣어 주신다. 교사들은 교회에서 올바르게 선택된 사람들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정하신 물질과 방법으로 집행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성례전이 아니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전의 분할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의를 혐오한다. 첫째 그 교회의 교역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교역자는 아니다. 즉 그들은 교회에서 성령이 세례를 받도록 교도하시지 않는 여자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허락한다. 둘째로 그들은 이 성례전을 그리스도의 성업과 근본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성례전과 혼동시키고 있다.
즉 기름, 소금, 춤, 세례의식 때의 다른 방법의 집행 등은 다 인간의 고안에 속한 것이다. 성찬의 빵을 상자에 넣어서 거리와 한길에 가지고 나가 돌리며 그것으로 성찬을 존경하게 만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례전을 파손하는 일이며 올바른 사용이 못된다. 그리스도는 “받아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고 하셨다. 그의 말씀과 권고에 따라 주님은 거룩한 몸과 피의 성례전을 위하여 빵과 포도주를 성별 하셨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시게 하기 위한 것이지 교황이 가끔 집행한 대로 그것이 신으로서 예배되거나 숭배되어서는 안 된다. 또 사람들에게서 성찬의 일부, 즉 거룩한 잔을 빼앗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자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이다. 또 성례전이 제정된 목적을 교역자와 수찬자가 다같이 이해하고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수찬자가 거기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면 올바로 성례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교사라 할지라도 성례전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잘못된 교의를 가르친다면 악한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목적과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혐오 할 일이다. 이제 이런 일이 로마 교회의 성례전에서 나타나는데 이런 것은 주 예수의 거룩한 성업의 외적인 형식과 그 목적과 견해를 파손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리스도가 행하시고 또 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복음서와 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되어 있다. 사제가 성단에서 행한 것을 우리가 상기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가 제정하시고 또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사용해야만 할 목적과 이유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 즉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나타내며 그가 오실 때까지 찬미하고 설교하고 존귀를 돌리며 찬양할 것을 제시한다 . 그러나 로마 교회의 사제가 어떤 목적과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미사를 집행하는지는 미사의 용어와 그들의 스승에게서 살필 수 있다. 즉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에게 희생 제물을 받치는 것이다. 이 교의는 그리스도 예수를 모독하는 것이며 한때 모든 사람의 정죄를 위하여 바치신 주님의 유일한 희생을 훼손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극도로 혐오하며 비난하는 것이다.
제23조 성례전의 참여자에 관하여
우리는 세례 의식은 성인으로서 사려가 있는 사람들에게와 신자의 유아들에게도 베푸는 것으로 믿고 또 인정한다. 그리고 신앙과 이해를 갖지 못한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거부한 재세례파의 과오를 우리는 거부한다. 그러나 주님의 성찬은 신앙의 권속들에게만 합당한 것임을 우리는 고백한다 . 우리는 그들의 신앙과 이웃 사람에 대한 의무를 시험해 볼 수 있다. 신앙 없이 성만찬을 먹고 마시거나 더구나 자기들의 형제들과 분열되어 다툰다면 합당하지 않게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는 우리들의 교역자가 공적으로 또는 특별하게 주 예수의 만찬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에 관하여 조사를 한다.
제24조 국가 공직에 관하여
우리는 제국, 왕국, 영지 및 도시 등은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또 제정하신 것으로 고백하고 인정한다. 제국의 황제, 왕국의 왕, 영지의 군주, 도시의 관리의 권력과 권위는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또 인류의 이익과 복지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장기간 수립된 시민적 질서를 부수고 혼란시키는 자는 인류의 원수일 뿐더러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여 싸우는 자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이러한 권위를 가진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가장 높여야 할 것으로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의 때에 하나님 자신이 앉아서 재판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또 재판관과 왕후는 선한 사람들을 칭송하며 보답하고 악인의 처벌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검을 받았다. 또 왕후, 군주, 관리는 우선 근본적으로 종교의 보존과 정화를 위한 임무를 가진 것으로 우리는 확신한다. 그것은 시민적 질서를 위할 뿐더러 참된 종교의 유지와 우상과 미신의 박멸을 위하여 정해진 것이다. 다윗,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아 및 그 밖의 왕 등이 신앙의 정화를 위하여 주의를 집중시켰고 특별한 칭찬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위의 권세는 다만 자기의 의무를 행하는 데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에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반항하는 것이며 죄가 된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그러나 왕후와 군주가 부지런히 자신들의 직무수행을 하는 한 누구든지 이들을 돕지 않고, 조언해주지 않고, 봉사하지 않으면, 이는 하나님께 대해서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한다.
제25조 교회에 거져 주신 은사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교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훈련이 실시되는 것은 참된 교회의 무오한 표지이지만, 그리스도 예수가 선택하신 사람들로서 특별한 사람들만이 이 교제에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라지도 곡식과 함께 파종되어서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선민들의 사람 안에 결합되어서 그들과 함께 외적인 말씀과 성례전의 은혜를 입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얼마동안 신앙을 고백해도 마음으로 하지 않고 다시 타락하여 마지막까지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열매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말한 대로 마음에서 진실 되게 믿고 입으로 분명하게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반드시 은혜를 받을 것이다. 첫째 이 세상에서 죄의 용서는 다만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신앙에만 달린 것이고 죄는 우리의 가멸적인 몸에 계속 붙어 있을지라도 그 죄를 우리에게 전가하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로써 덮어 주신다는 것이다. 둘째는 전체의 심판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몸의 부활을 주신다는 것이다. 바다는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을 내어놓으며 땅은 그 안에 갇힌 자를 내어놓으며 영원한 하나님은 그의 손을 티끌 위에 펼치시며 죽은 자들은 썩지 않는 자로 부활하며 모든 사람이 매장되던 날의 모습으로 되살아나며 그들의 행위에 따라 영광 아니면 형벌을 받을 것이다.
이제는 헛된 환희와 잔악과 음행과 미신과 우상숭배는 꺼지지 않는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몸과 영혼이 영원한 고통을 받으며 또 모든 더러움과 악 가운데서 악마에게 봉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잘 견디어 주 예수에게 신앙을 계속 고백한 자는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얻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되며 주님에게 선택된 자는 다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되어서 성부 하나님의 왕국에 들려 올라갈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며 영원히 하나님으로 영원토록 계신다. 성자와 성령과 함께 성부 하나님에게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바이다. 아멘.
“주여 일어나셔서 당신의 원수들을 쳐부수소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미워하는 그들이 당신 앞에서 도망쳐 가게 하소서. 당신의 종에게 힘을 주셔서 확신을 가지고 용감하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모든 백성들이 당신의 참된 지식을 알게 하소서. 아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1563)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는 독일 지역에서 만들어진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이다. 독일은 이미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신앙을 받아 들였던 지역으로서 활발하게 종교개혁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1540년을 접어들면서 하이델베르그에서는 새로운 신앙의 모습이 제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1546년 프레데릭 2세에 의해서 좀더 바른 신앙의 모습을 세우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데릭 2세는 멜랑히톤을 초빙해서 신학 교수로 세우고자 했으나 멜랑히톤이 이를 거절하고 단지 여러 가지고 도움을 주는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멜랑히톤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프레데릭에게 끼쳤으며, 그 결과 멜랑히톤의 신학적 사고처럼 하이델베르그에서는 루터주의와 칼빈주의의 신학을 조화 시켜려는 모습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루터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가 교리적인 기초로 제시되었으며, 또한 예배의식에는 쯔빙글리의 방식이 채용되었다.
그리고 16세기의 정치적 혼란으로 하이델베르그에 칼빈주의 자들이 속속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하이델베르그에는 루터파와 칼빈파와 쯔빙글리파가 혼합되어 발전되는 양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공재설”에 대한 입장 표명에 따라서 각 분파가 심하게 충돌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이런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프레드릭 3세(Frederick Ⅲ)였던 것이다. 그는 각 교파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칼빈주의 신학정신에 많은 호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신학적인 혼란을 제거하고 또한 후손들의 건전한 종교교육에 건전한 기초가 될 수 있는 신앙교육서를 제정하고자 하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처럼 독일의 선제후인 프레드릭 3세(Frederick Ⅲ)의 명령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인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와 궁정 설교자인 올리비아누스(Caspar Olevianus)에게 본 요리문답을 작성하도록 제시했던 것이다.
프레데릭은 1562년 12월에 이 요리문답서를 수정하여 승인 받기 위해서 주요 목사들과 교수들의 총회에 이 작업을 위임했다. 그 결과 1563년 초에 “팔라티네이트 선거후의 지역에 있는 교회와 학교에서 가르칠 요리문답, 또는 기독교 교훈집”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문답서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뽑아 낸 우리 기독교의 요약된 교훈서, 또는 요리문답서이므로 이후 교회와 학교에서는 다음 세대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를 바란다”라고 서문에 간략하게 자신의 입장을 제시해 주므로 이 요리문답서가 당시 개혁교회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1600년에 있었던 국가 종교회의에서는 이 요리문답을 교회의 통일된 교리 규범의 하나로서 채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교회의 책임자는 이에 서명하고 모든 목사는 교회에서 이 요리문답을 설명해 주는 것을 의무화하도록 규정하기도 했다. 또한 이것은 1618-1619년 도르트회의 때에도 중요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의 가치는 화란 개혁파 교회에서는 이것을 청소년 신앙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기도 했으며, 주일 저녁 설교로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1568년에서 1571년까지는 화란의 개혁 교회와 라인강 하류 지방과 헝가리, 체코, 폴란드에 있는 개혁 교회가 이것을 사용했으며 이것은 1609년 미국 땅에 나타난 최초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이기도 하다.
특별히 본 신앙고백서는 역사적인 독특성이 충분히 이해되면 더욱 본 조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즉 프레드릭(Frederick)은 본 신앙고백서를 인준함으로 인해서 1566년 5월14일 고소를 당하였으며, 이단으로 제소되는 위기에 당면하게 되어 개혁주의 신앙으로부터 돌아설 것과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Frederick은 물러나지 않고 진지하게 황제 MaximillaⅡ세와 루터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신앙고백의 목적과 원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양심을 거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왕관을 벗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담대하게 외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계속해서 이 요리문답이 모두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도저히 반증할 수 없는 성경적 근거들을 들어 반박했으며, 이 일에서 이 보다 더 성경적인 것을 보여주는 자가 있다면 기꺼이 하나님의 진리에 따르겠다고 외쳤던 것이다. 결국 이런 프레데릭의 강경한 바른 신앙에 대한 정신의 확립으로 인해서 후에 그는 루터파와 황제에게서 까지도 ‘경건한 프레데릭’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위기를 벗어나는 중요한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프레데릭이에게 가장 어려움을 준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루터파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파 신앙의 독특한 역사적인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루터파에게 있어서 조차도 이 요리문답의 신앙적 정신은 자신의 신앙과 일치시킬 수 없는 이단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이런 신조의 역사를 통해서 왜 역사적 개혁교회가 루터주의자들과 함께 할 수 없는지를 알게 된다. 즉 루터주의도 결국에는 개혁신앙과 교리적인 핵심 부분에서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에게 이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요리문답을 개혁교회에서는 당시 전체적으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개혁파 신앙이 일반 비(非)개혁신앙과 얼마나 다른 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요리문답은 프레데릭의 장남인 “루이 6세”(루터주의자)에 의해서 큰 수난을 당하게 된다. 즉 이 요리문답을 작성한 자들을 추방하고 또한 요리문답의 배포금지와 불태움을 입는 수난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요리문답이 출판된 이후에는 이른바 이 요리문답의 성격이 쯔빙글리적, 또는 칼빈주의적 이단이라는 이유 때문에 엄격한 루터파에게 극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로마 카톨릭파에게도 미사제도를 우상숭배라고 정죄한 제 8문 때문에 많은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수난의 과정 속에서 본 요리문답의 개혁신앙적인 정신의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우르시누스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서 자신이 제정한 요리문답서를 옹호하기 위해서 변호서(Admonitio christiana)를 작성하기도 했으며 또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석(Explicationes Catecheticae)을 출판하여 개혁신앙의 독특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책들은 루터주의 자들로부터 비난들과 오해들에 대한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오히려 그 대답에서 루터주의와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들을 더욱 분명하게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본 요리문답은 루터주의와 카톨릭과 구별되는 철저한 개혁주의적 성격을 분명히 제시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는 당시의 개혁교회 신앙인들에게는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깊이 연결된 실천적인 삶에서의 고백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레데릭Ⅲ세가 이 요리문답이 의도하는 바가 3가지임을 밝히고 있는 글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먼저 교리적 가르침의 틀을 제공하고, 설교의 지침을 마련하며, 단일한 고백서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계속해서 “만일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생의 초기에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교육받게 되면, 그것은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공적 도덕과 사적 도덕, 그리고 세속적 문제와 영원한 문제에 대한 개혁을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는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서 이에 따라서 가르치고, 행동하며, 살도록 해야 한다”라고 그 목적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나 무엇보다도 본 신앙고백서의 작성 목적의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 내에서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와 개혁파 속에서 철저한 ‘성경적인 요리문답’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 개혁주의적 특성으로서 중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이와 같은 본 요리문답의 역사를 통해서 이미 앞서서 언급했던 내용들을 반복해서 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프레데릭은 개혁주의자였고 장남은 루터주의자로서 부자간에 신앙고백의 표명에 따라서 입장이 전혀 달라지는 역사를 보게된다. 여기서도 여전히 가족간의 관계에 앞서서 지켜지고 보호되어야 할 진리의 가치와 자리가 제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표명은 높고 거룩한 신본주의의 정신이 깊이 배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정신을 가지고 이런 역사를 보면 도무지 이와 같은 역사가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무자비하고 고집적이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프레데릭을 통해서도 제시되었던 것처럼 교회에서 이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채택하고 표명하는 것은 누구는 해도 되고 또는 안 해도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성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 사항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더욱 철저하고 엄밀하게 이 신조를 채택하고 드러내는 데 있어서 엄숙한 서약을 해야 하며 또한 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그 첫 번째 임무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제1주일
제1문: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답: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제2문: 이러한 기쁜 위안 속에서 살고 죽기 위하여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답: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의 죄와 그 비참이 얼마나 심각하며 둘째 어떻게 그 죄와 비참에서 벗어나며 셋째 어떻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인가 하는 일입니다.
제1부 인간의 비참
제2주일
제3문: 어떻게 당신의 비참을 알 수 있습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이 내게 가르쳐 줍니다.
제4문: 하나님의 율법이 당신께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요약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제5문: 당신은 그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과 내 이웃을 미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3주일
제6문: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사악하고 불의하게 지으셨습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선하게 즉 의롭고 거룩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며 그의 영광과 존귀를 위하여 그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제7문: 그러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어디서 왔습니까?
답: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비롯되었습니다. 그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성이 부패되어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제8문: 그렇다면 우리는 너무 부패하여 선이란 전혀 행할 수도 없고 모든 악을 향해 기울 뿐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제4주일
제9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규정하신 것은 부당한 처사가 아닙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악마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무분별하게 불순종함으로 자신은 물론 후손들까지 그 능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
제10문: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항을 형벌 없이 허락하실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범죄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원죄에 대하여도 대단히 진노하십니다.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이제와 영원히 죄인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제11문: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비가 없으신 분입니까?
답: 하나님은 분명히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또한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죄, 곧 그의 높으신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 무거운 처벌 즉 육신과 영혼의 영원한 형벌을 내리십니다.
제2부 인간의 구원
제5주일
제12문: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우리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형벌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답: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나 다른 이가 그의 정의를 완전히 만족시켜 드려야 합니다.
제13문: 우리 스스로 죄 값을 치를 수 있습니까?
답: 절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더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제14문: 그러면 다른 피조물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를 수 있습니까?
답: 없습니다. 우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벌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더구나 어떠한 피조물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감당할 수 없으며 다른 피조물을 구속할 수도 없습니다.
제15문: 그렇다면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기대해야 합니까?
답: 그는 참 사람이면서, 진실로 의로우시고 모든 피조물보다 큰 능력을 소유하신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제6주일
제16문: 왜 그분은 참 사람이면서 진실로 의로우셔야 합니까?
답: 하나님의 공의가 그것을 요구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사람이 자기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다른 사람들의 죄 값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제17문: 왜 그분은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그래야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몸소 감당하여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의와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8문: 그러면 그 중보자 곧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고 진실로 의로우신 분은 누구입니까?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제19문: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답: 성경이 내게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선 이미 에덴동산에서 복음을 계시하셨고 그 후엔 거룩한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하셨고 율법의 의식과 희생 제사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보여 주셨으며 마침내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성취하셨습니다.
제7주일
제20문: 모든 사람들이 아담을 통하여 타락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서 그의 모든 축복을 받은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제21문: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시하신 모든 것은 진실하다는 것을 알는 지식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순전한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도 역시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의롭게 되었으며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내게 불어넣어 주시는 것을 믿는 굳건한 확신입니다.
제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입니다. 그 복음은 사도신경에 요약되어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고백되어지는 믿을 만한 기독교신조입니다.
제23문: 사도신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답: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사도신경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신경으로 니케아신경이 있습니다.)
제8주일
제24문: 사도신경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답: 셋으로 구분됩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가 그것입니다.
제25문: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라 하면서 왜 삼위(三位), 즉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신을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삼위(三位)가 곧 유일하고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제9주일
하나님 아버지에 관하여
제26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버지 곧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영원한 경륜과 섭리로 그것들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매우 신뢰하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며 이 슬픈 세상에서 내게 닥친 모든 역경을 선으로 바꿔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으며 신실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기꺼이 하시는 것입니다.
제10주일
제27문: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답: 섭리란 하나님께서 항상 지니고 계신 전능하신 능력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을 붙드시고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꽃잎과 풀잎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양식과 음료 건강과 질병 번영과 궁핍 이 모든 것들이 사실상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애로운 손길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제28문: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앎으로써 얻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역경에 처할 때는 인내하게 되며 장차 아무것도 우리를 당신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큰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만물이 온전히 그의 것이기에 그의 뜻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움직이거나 움직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제11주일
하나님 아들에 관하여
제29문: 왜 하나님의 아들을 ‘구세주’라는 뜻의 ‘예수’라고 부릅니까?
답: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께 있으니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제30문: 성현들이나 자기 자신 또는 다른 곳에서 구원과 평안을 찾는 사람들도 진실로 구주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께 속했다고 주장할지라도 그 행위로 말미암아 유일한 구원자이신 구주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구주가 아니시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구세주를 영접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제12주일
제31문: 왜 예수님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까?
답: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으심으로 우리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과 뜻을 완전하게 계시해 주는 위대한 선지자가 되셨고 자기 몸을 화목제로 드려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죄에서 승리하시는 삶을 살도록 늘 지켜 보호하시는 영원한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제32문: 그러면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까?
답: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한 지체가 되어 그의 기름부음에 동참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주의 이름을 시인하고 나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며 선한 양식을 가지고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며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만물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13주일
제33문: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유독 예수님만 ‘외아들’(독생자)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답: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참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제34문: 예수님을 ‘우리 주’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답: 예수님께서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제14주일
제35문: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지니신 채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처녀 마리아의 혈육으로부터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취하셔서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우리와 같은 형체가 되어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다는 뜻입니다.
제36문: 예수님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그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흠 없고 완전한 성결로써 잉태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15주일
제37문: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예수님께서 전 생애를 특히 그의 마지막 순간에 전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몸과 영혼으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정죄로부터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주시기 위한 유일한 구속 제사였습니다.
제38문: 왜 예수님은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까?
답: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 위에 선고되어야 했던 엄격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추가: 이 말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적인 심판이 필요했던 것이며 또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무서운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제39문: 예수님께서 다른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다는 확신을 줍니다.
제16주일
제40문: 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길로 가셔야만 했습니까?
답: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는 방법 외에는 우리의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기기 때문입니다.
제41문: 왜 그리스도는 “장사지내”졌습니까?
답: 그의 장사는 그의 죽음이 실제적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해 줍니다.
제42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답: 우리의 죽음은 죄 값을 치루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더 이상 범죄 하지 않게 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관문인 것입니다.
제43문: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부터 얻게 되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옛 자아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고 묻힘으로써 육신의 악한 욕망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고 그 대신 우리 자신을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44문: 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는 구절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개인적인 유혹과 위기에 처해있을 때마다 주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상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영혼의 슬픔과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지옥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입니다(즉 실제적으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의미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제17주일
제45문: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성취하신 의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이미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광스러운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입니다.
제18주일
제46문: “하늘에 오르사”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위해 그곳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47문: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인간적인 본성(인성)으로는 지금 이 땅 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그의 영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제48문: 만일 신성이 있는 모든 곳에 인성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불가해하고 어디에나 현존하기 때문에, 그 취한 인성 외부에 있을지라도, 그 안에 있어서도 인격적으로 인성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제19주일
제50문: 왜 그다음 구절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그곳은, 그분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성부께서 그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제51문: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그러한 영광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지체인 우리들에게 하늘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그 크신 능력으로 모든 원수들로부터 우리들을 지키고 보호해 주십니다.
제52문: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은 당신에게 어떤 위안을 줍니까?
답: 박해와 고통 가운데 처해 있을 때에도 나는 하늘을 보며 내 대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심으로써 나에게 미칠 모든 저주를 없애 주신 심판의 주를 확신 있게 기다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원수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하늘의 기쁨과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제20주일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제53문: “성령”에 대해서는 무엇을 믿습니까?
답: 첫째, 성부, 성자와 함께 성령도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성령께서는 나로 하여금 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의 모든 축복에 동참하게 하시며 나를 위로하시고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내게 임하신 것입니다.
제21주일
제54문: “거룩한 공회(교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인류 가운데 영생을 얻도록 선택된 성도를 참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 공동체로 모으시며 보호하시며 보전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물론, 나도 이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언제까지나 그 일원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제55문: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첫째, 신자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들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각 신자들은 자신의 은사들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감사함으로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56문: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에 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나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내 죄와 나를 미혹하는 죄성에 대하여 정죄치 아니하심을 믿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말미암아 내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셔서 심판으로부터 나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제22주일
제57문: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안을 줍니까?
답: 죽음 후 바로 내 영혼이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로 갈 뿐 아니라 내 몸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서 영혼과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영화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제58문: “영원히 사는 것”에 관한 구절은 당신을 어떻게 위로합니까?
답: 내가 이미 영원한 기쁨을 마음속으로 경험하고 있듯이 죽은 후에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였던 완전한 행복 즉,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23주일
제59문: 이 모든 것을 믿으면 당신에게 어떠한 유익이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자가 되며 영생의 후사가 됩니다.
제60문: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범하였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지키지 못했으며 아직도 죄로 향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고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가치한 나를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치 내가 죄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순종하신 것을 내가 순종한 것처럼 대하시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의와 성결을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마음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것뿐입니다.
제61문: 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내 믿음에서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와 성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제24주일
제62문: 왜 선행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왜 선행은 의로워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완전하며 여전히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63문: 하나님께서는 선행에 대하여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당신은 그토록 선행을 무시합니까?
답: 그 보상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제64문: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러한 교훈으로 인해 선행에 관하여 무관심해지고 사악해지지 않겠습니까?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25주일
거룩한 성례에 관하여
제65문: 당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그의 복에 참여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답: 성령께서 거룩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믿음을 넣어 주시며 거룩한 성례를 사용하시어 그 믿음을 강하게 하십니다.
제66문: 성례란 무엇입니까?
답: 성례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룩한 표시이며 날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세우셔서 그것을 집행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의 약속한 것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자신의 약속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음은 이것입니다. 즉,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67문: 그러면 말씀과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수행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로 향하게 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실 뿐 아니라 거룩한 성례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달려있다고 확신시켜 줍니다.
제68문: 신약성경을 통해서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몇 가지 성례를 제정하셨습니까?
답: 두 가지입니다. 즉,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제26주일
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제69문: 세례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당신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시켜 줍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외부적 씻음의 제도를 정하셔서 물이 더러운 몸을 씻어내듯이 그의 피와 영으로 우리 영혼의 죄악을 깨끗이 씻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제70문: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 씻음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씻음 받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도록 구별하셔서 점차 죄에 대하여는 죽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제71문: 우리가 물세례로 씻음을 받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도 씻음 받는다는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제정하실 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세례가 중생의 씻음과 죄의 씻음이라고 언급된 다른 성구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제27주일
제72문: 물에 의한 외부적 씻음 자체가 죄를 씻어 줍니까?
답: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줍니다.
73문: 그러면 왜 성령께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의 씻음이라고 부르십니까?
답: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주듯이 그리스도의 피와 영이 우리의 죄를 씻어준다는 점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신적 보증과 표지를 통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영적인 씻음이 물에 의한 몸의 씻음처럼 실제적이라는 점을 확신시켜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74문: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유아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주시는 성령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의 증표인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되고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이것이 할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며 신약에 와서 세례로 대치된 것입니다.
제28주일
거룩한 성만찬에 대하여
제75문: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그리스도의 속죄제사와 그의 모든 복에 당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성만찬은 어떻게 상기시키고 확신시켜 줍니까?
답: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모든 신자들에게 이 뗀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명령과 함께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첫째, 나를 위하여 떼신 주님의 떡과 나에게 주신 잔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듯이 주님의 몸도 나를 위하여 바쳐지고 찢기셨으며 그의 피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내게 주어진 주님의 떡과 잔을 집례자로부터 받아서 입으로 맛보는 것이 분명하듯이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몸과 흘리신 피로 영생에 들어가도록 내 영혼을 새롭게 하시며 살지게 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76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죄와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된 몸에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을지라도 우리의 육체는 주님의 살이며 주님의 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신체의 각 부분이 한 영혼에 의하여 지배를 받듯이 우리도 한 성령에 의하여 지배를 받으면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29주일
제78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화됩니까?
답: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되지 않고 그 자체가 죄를 씻지 못하며 단순히 하나님께서 주신 상징이요 확신이듯이 성만찬의 떡이 비록 성례의 본질과 용어상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릴지라도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79문: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자기 몸이요, 잔을 자기 피, 혹은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고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만찬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실제적으로 동참하는 것(직접 먹고 마심)’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떡과 포도주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살지게 하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의 몸과 흘리신 피가 진실로 우리 영혼을 영생에 이르도록 살지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상징물들을 실제로 받아먹듯이 우리도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는 상징과 보증에 의하여 주님의 실제 몸과 피에 참여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몸소 고난을 겪어 죄 값을 지불한 것처럼 주님의 고난과 순종을 우리의 공로로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제30주일
제80문: 성만찬은 로마 카톨릭의 미사와 어떻게 다릅니까?
답: 성만찬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통해서 우리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선언입니다. 또한 그것은 성령께서, 하늘 아버지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연합케 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미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사제들에 의하여 날마다 산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하여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는 사죄를 얻지 못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나타나셔서 그곳에서 그리스도가 경배를 받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저주받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제81문: 주님의 식탁에는 누가 참여할 수 있습니까?
답: 자기의 죄를 미워하고 고난과 죽음에 의하여 자기 죄가 용서받고 사악함이 가려진다는 것을 믿으며 그 믿음이 더욱 강해져서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과 회개치 않는 자들은 그들의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제82문: 말과 행위로 불신앙과 불경건을 드러내는 자들을 성만찬에 참여하게 해도 됩니까?
답: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일이며 전 회중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및 사도들의 교훈을 좇아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공적으로 사용하여 그들이 회개할 때까지는 그들을 배제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31주일
제83문: 천국의 열쇠란 무엇입니까?
답: 거룩한 복음의 설교와 회개를 위해 시행되는 기독교 권징입니다. 즉 이 두 가지를 통하여 천국의 문은 복음 전파와 권징을 통하여 신자들에게는 열리고 불신자들에게는 닫히는 것입니다.
제84문: 어떻게 천국의 문이 복음 전파에 의하여 열리고 닫힙니까?
답: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즉, 모든 신자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선포하고 선언함으로써 천국의 문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고 공적으로 선포하고 선언함으로써 천국의 문은 닫히는 것입니다. 금생과 내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러한 복음 증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제85문: 어떻게 천국의 문이 기독교 권징에 의하여 닫히고 열립니까?
답: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한다 할지라도 비기독교적인 교리를 믿고 비기독교적인 생활을 하고 교우들의 계속적인 권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과 사악함을 끝까지 고집하여 그 사실이 교회의 직임자들에게 알려지고 마침내 그들의 훈계마저 거부한다면, 그 직임자들은 그러한 자에게 성례참여를 금지(수찬정지)시킴으로써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쫓아내실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사람이 참다운 회개를 약속하고 그것을 실천해 보이면 그리스도와 그 교회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이게 됩니다.
제3부 인간의 감사
제32주일
제86문: 우리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왜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합니까?
답: 분명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한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구원의 열매에 의해서 우리 믿음이 확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건한 행실에 의해서 이웃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87문: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회개하지도 않으므로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답: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정한 자, 우상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적질하는 자, 주정뱅이, 거짓말쟁이(비방하는 자), 강도 등과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제33주일
제88문: 참다운 회개 또는 회심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답: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옛사람이 죽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새 사람으로 사는 일입니다.
제89문: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죄를 마음 깊이 슬퍼하고 그것을 더욱 더 미워하고 피하는 일입니다.
제90문: 새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말씀)을 즐거이 행하는 것입니다.
제91문: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 자신의 의견이나 사람의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된 믿음으로만 행하는 일이 선입니다.
제34주일
제92문: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20:1-17; 신명기5:6-21).
제1계명: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 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제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제93문: 이러한 계명들은 어떻게 나뉩니까?
답: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으며, 둘째 부분에서는 우리가 이웃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94문: 제1계명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답: 나의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우상 숭배와 마술과 미신적인 제사를 피하고 성자들이나 피조물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피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을 올바르게 인정하고 신뢰하며 겸손과 인내심을 가지고 모든 선을 받기를 원하며 나의 온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라면 결단코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95문: 우상숭배란 무엇입니까?
답: 우상숭배란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에 또는 그 옆에(동등하게) 그 무엇을 신뢰하거나 만들어 소유하는 일입니다.
제35주일
제96문: 제 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어떠한 형태로든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말씀을 통하여 명령하신 방법과 다르게 그를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97문: 그러면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아야 합니까?
답: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어떠한 모양을 가진 분으로 그려질 수 없으며 그려져서도 안 됩니다. 피조물은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으나, 그것들이 예배의 대상이 되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그러한 형상들을 만들거나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98문: 그렇다면 그 형상들을 교회에서 학습보조 교재로 사용하는 것도 안 됩니까?
답: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다 더 현명해지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우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의 전파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제36주일
제99문: 제3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그의 이름을 빌어서 저주, 거짓맹세, 또는 불필요한 맹세를 하지 말며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어서 그러한 무서운 죄악에 간접적으로 동참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계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용하여서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로 그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찬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00문: 맹세와 저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그것을 방조하거나 금지시키지 않은 자들에게까지 분노하실 만큼 그렇게 무서운 죄입니까?
답: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으며 그것보다 더 그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하여 죽음의 형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제37주일
제101문: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맹세한다면 그것은 괜찮지 않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진리를 보존하고 신뢰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에서 맹세가 필요한 상황이 생기거나 정부가 그것을 요구할 때 가능합니다. 이러한 맹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인정되고 있으며 신구약의 신자들에 의하여 적절하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제102문: 성자들이나 다른 피조물에 의지해서 맹세해도 됩니까?
답: 안됩니다. 올바른 맹세는, 나의 마음을 아시고 나의 진실성을 증거하셔서 만일 거짓 맹세를 한다면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그러한 영예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제38주일
제103문: 제4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복음전파와 복음에 관한 교육이 계속되어야 하며 특별히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인 기도를 드리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을 바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정규적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내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나는 힘겨운 일상생활의 악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생에서 이미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39주일
제104문: 제5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웃어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훈계하고 징계할 때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들의 결점까지도 참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제40주일
제105문: 제6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내 이웃을 생각이나 말이나 외모나 몸짓으로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는 실제행동으로 얕잡아보거나 모욕하거나 증오하거나 죽이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일에도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복수에 불타는 모든 마음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또한 내 자신을 해롭게 하거나 성급하게 위기에 빠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정부가 무기를 갖추고 있는 까닭의 하나는 바로 살인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제106문: 이 계명은 오직 살인만을 언급하는 것입니까?
답: 살인을 금지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살인의 근원 곧 시기, 증오, 분노, 앙심 등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살인에 해당합니다.
제107문: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 이웃을 죽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말입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증오와 분노를 정죄하심으로써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우정으로 대하며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선을 베풀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제41주일
제108문: 제7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륜한 행위를 정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것을 미워하고 거룩한 혼인을 통한 생활에 있어서나 독신으로 살든지 순결하게 살고 규모 있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109문: 이 계명에서 하나님은 오직 간음과 같은 추악한 죄만을 금하신 것입니까?
답: 우리의 몸과 영혼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전(殿)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영혼이 정결하고 성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불륜한 행동을 금하고 표정이나 말이나 생각이나 욕망 또한 그 이외에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을 그러한 곳으로 끌어가게 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제42주일
제110문: 제8계명에서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단지 법률로 금지되어 있는 공공연한 도둑질과 강도짓만을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도둑질이란 비록 그것이 겉으로는 합법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이웃을 속이는 모든 행위 즉 저울과 자와 되를 속이는 일, 사기, 위조, 폭리, 또는 하나님이 금지한 기타 모든 수단들이 포함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탐욕과 자신의 은사들을 무분별하게 낭비하는 모든 일들을 금하십니다.
제111문: 이 계명에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답: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들을 대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제43주일
제112문: 제9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뜻은 아무에게도 거짓 증언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지 말며 잡담이나 비방하지 말고 정당한 이유 없이 또는 사연을 들어보지도 않고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정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거짓말이나 모든 위증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한 일들은 악마가 사용하는 수단이며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초래합니다. 오직 진리를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며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의 선한 이름을 보호하고 드높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제44주일
제113문: 제10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욕망을 추호도 마음속에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한상 죄를 미워하고 선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제114문: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이 모든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완전한 순종을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명들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지키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제115문: 아무도 이 세상에서 십계명을 지킬 수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십계명을 지킬 것을 엄히 명령하셨습니까?
답: 첫째로, 우리가 오래 살면 살수록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죄성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 더 사죄와 칭의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마지막에 생이 끝난 다음에 우리 목표인 완전한 순종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점 더 새롭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총을 간구토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45주일
기도
제116문: 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합니까?
답: 기도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가장 큰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성령을 계속해서 간절히 구하며, 응답해 주심을 믿고 감사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117문: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까?
답: 첫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그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를 인정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말며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 비록 우리는 무가치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고한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제118문: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답: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영육간에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119문: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제46주일
제120문: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명령하셨습니까?
답: 기도의 첫머리에 그리스도께서는 기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사실을 어린아이처럼 믿고 경외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자녀들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제121문: ‘하늘에 계신’이란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의 하늘 권세를 땅의 권세와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부터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제47주일
제122문: 첫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의 뜻은 먼저 하나님 당신을 바르게 알고, 거룩하게 하며, 영광을 드리며, 당신이 하신 모든 일을 통하여 그의 전능과 지혜와 선과 의와 자비와 진리가 빛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말의 뜻은 우리의 삶 곧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도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더럽혀지지 않고 오직 존경과 찬양만 받으실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48주일
제123문: 두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 더욱 더 순종할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보존케 하며 부흥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단의 모든 세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모든 음모를 분쇄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완성되어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제49주일
제124문: 세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의 뜻은 우리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뜻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만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명을 하늘의 천사들처럼 자발적이며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50주일
제125문: 네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말의 뜻은 우리의 육신적 필요를 채우셔서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의 유일한 근원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우리의 노고와 걱정 그리고 하늘의 은사조차 어떠한 유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제51주일
제126문: 다섯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말의 뜻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말미암아 불쌍한 죄인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항상 괴롭히는 악을 제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듯이 그렇게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52주일
제127문: 여섯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는 너무 미약하여서 잠시라도 스스로 우리를 지킬 수 없으며, 또한 철천지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체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므로,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영적투쟁에 패배하지 않고 최후의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강력하게 원수를 대적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128문: 이 기도의 결론 부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의 의미는,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왕이 되셔서 만물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이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토록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29문: ‘아멘’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아멘’이란 이것이 참되고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며, 내가 기도한 것이 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내 마음의 소원 이상으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