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생각

2월 23일 주일예배

성령의 생각

로마서 8:26-39

들어가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원하는 열정과 비전을 지닌 청년들을 네트워킹 하는 회사 ‘엠트리(M-tree)’의 최영환 대표의 이야기를 세바시 강의에서 접했습니다. 그는 아주 독특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학사장교로 군복무를 하면서 군대에서 나누어주는 우유를 마신 후 우유곽을 펼쳐서 세계의 유명인사들에게 편지를 써보내게 되었고 제대후에는 세계를 돌면서 그들을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만났던 ‘World Changer’의 희망을 가진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네트워킹하는 기관을 세우게 된 것이지요. 그기 했던 일보다 더 관심이 갔던 것은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허황된 꿈같은 이상을 향해 도전했던 무모함과 정신에 저는 감동을 했습니다. 그는 ‘나는 도구입니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도구는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도구는 목적대로 사용될 때 가장 가치가 있습니다. 공구에 불필요한 칠을 하거나 장식을 붙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망치에다 인형 옷을 입혀 놓는다면 사용하기도 불편하고, 보기에도 썩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자기부인(Self-Denial)은 멋진 인생 목적과 의미에 불필요하게 덧붙여둔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은 성령과 자기부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오늘 본문에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생각에는 세 가지가 소개되는데,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성령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성령의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이 어구가 품고 있는 다양한 뜻이 있는데, 첫째는 성령 하나님이 실존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성령의 생각이 생애구조(Life-System)이고, 셋째는 성령안에 생명과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의 자기부인을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1. 내 안에 계신 하나님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특징 중에 두 가지는,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개혁주의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반드시 기억해야하는 교리 두 가지가 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나에 대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며 나는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아는 지식으로만 끝나면 복음이 헬라화 한다고 합니다. 그 신지식이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철저한 자신에 대한 깨달음과 발견이 있을 때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그 감사와 사랑이 삶의 원칙이 될 때 우리는 참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는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교리는 그 어떤 기독교 사상보다 더 성령 중심적입니다. 교리의 모든 곳에 성령의 내적 증거가 없으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렇게 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한 말씀은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을 교회가 사모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도 아니고 먼 지역에서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지금 내 안에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내가 지금 영적 충만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육체가 병들었을 때 아픈 것 처럼, 자신이 영적으로 병들어 아프다는 것을 인지해야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자기 수련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첫째는 나의 죄성과 영적 나태함, 자기만족, 믿음이 없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충만한 축복을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하는 고백이 신자들의 아주 깊은 곳에서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을 위한 걸음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어떤 것에도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의 운동 원인자가 신이라는 운동증명입니다. 둘째는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원인이 있으므로 그 첫번째 능동원인이 신이라는 원인증명입니다. 셋째는 모든 사물의 근원이 되는 필연적 존재로서의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필연증명입니다. 넷째는 우주에는 다양한 등급의 완전함이 존재하는데 가장 완전한 정점의 존재가 신이라는 등급증명입니다. 다섯째는 모든 사물은 어떤 목적에 따라 활동하는데 그 목적을 정해주고 이끎으로 목적에 부합하는 질서를 이루어가는 지적 존재가 신이라는 목적증명입니다.
위의 다섯번째 목적론적 증명에 주목합시다. 길은 사람과 차가 다니기 위해 생겨납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길이 생기지 않습니다. 길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삶을 영위함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사람은 ‘길바닥에 던져진 돌’처럼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선한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은 그 목적에 합당한 삶, 즉 최고의 복과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보내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최고의 복(지복)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거기에 불필요한 장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생명 그 축복으로 충분합니다.

2. 영의 생각

청교도신학자 존 오웬이 1961년에 쓴 기독교의 클래식 ‘영의 생각의 은혜와 책임’이라는 경건서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5-6절 말씀을 주제로 그는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에 대해 증거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평안이니라(롬 8:5-6)”
생명과 평안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사도 바울은 생명과 평안은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영의 생각을 갖기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영적인 마음과 육적인 마음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둘 사이에서 계속되는 싸움을 뼈저리게 자각합니다.
‘영의 생각’에서 영은 성령의 생각(롬8:9)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 속에 생성되는 새로운 영적 생명(요3:6)입니다. 영의 생각이란 ‘신자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활동’입니다. 이 영적인 마음은 세 가지로 구성됩니다. 첫째, 영적인 것에 집중하는 마음, 둘째, 영적인 것에 대한 사랑의 증진, 셋째, 영적인 것에 의해 생기는 참된 만족 체험입니다.
결실이 없는 생각은 영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에스겔 33: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불신자도 때로는 영적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기도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생각을 이따금 하는 것은 참된 영적 마음이 아닙니다. 가끔씩은 설교를 경청하기도하고 기도를 유창하게 하기도 하며, 영적인 대화에 관심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쉽게 그런 마음은 떠나 버립니다.
호텔주인에게 손님과 자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생각이 호텔을 방문한 손님 같은지 아니면 집에 거하는 자녀 같은 지 자문해보면 압니다. 호텔에 손님이 도착하면 일시적으로 부산하지만, 잠시 후 그들은 떠나고 잊혀집니다. 그러면 호텔은 다른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자녀라면 다릅니다. 자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부모는 걱정하며 기다립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언제나 기대감을 가지며 자녀를 잃어버리면 찾으려고 애씁니다.

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증거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창6:5). 영적인 마음은 생각의 지속적인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질병에서 치유된 사람은 건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전에 약한 채로 있으면 또 다른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즐거움을 가져야 합니다. 주요 관심사와 삶의 우선순위를 하늘에 두어야 합니다. 한적한 시간에는 영의 생각이 떠올라야합니다. 습관과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영적 묵상의 기회를 잃으면 속이 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빌립보서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3. 성령께서 주는 감사는

1) 자유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주는 해방에서
2)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3) 자녀의 영광입니다.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습니다.
4) 속량과 구원의 소망입니다.
5)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6) 그 소망은 절대로 상실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자율적 수행을 거부합니다. 기독교는 수행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자기부정과 고백의 종교입니다. 수행으로 나를 비우고 욕정을 이기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너무 깊은 죄악 속에 빠져있으며 이는 진흙늪과 같아서 점점 끝없는 나락으로 내려갈 뿐 스스로 거기서 나올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기 무능력을 인정하고 거기에 눈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단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면 되는 겁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각성이 일어나면 처연한 삶이 나옵니다. 행복에 연연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불행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행복합니까 혹은 감사합니까?
행복은 욕망으로 재산을 나누었을 때 갖는 값입니다. 행복이 물질과 지식의 들줄 날줄로 엮인 묶음체라면 감사는 그 행복을 이루는 원칙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17장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1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떨어져 나갈 수 없고, 다만 끝까지 그 가운데 확실히 인내하여,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2 성도들의 이러한 견인은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값없이 주시고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택 작정의 불변성에 의한 것이다.2)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기도의 효력,3) 그들 안에 성령과 하나님의 씨의 거하심,4) 은혜 언약의 본질에 의한 것이다.5) 성도의 견인에 대한 확실성과 무오성은 또한 이 모든 것에서 기인된다.6)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과 세상의 유혹, 자기 안에 남아있는 부패의 만연함, 자기를 보호하시는 방편들에 대한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극악한 죄에 빠지기도 하고,7) 잠시 그 가운데 머물러 있기도 한다.8)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고,9) 그분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10) 자기의 은혜와 위로를 어느 정도 빼앗기게 되고,11) 자기 마음이 굳어지고,12) 자기 양심이 훼손되고,13)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하고,14) 자기 스스로에게 일시적인 징계를 초래한다.

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1 주 예수를 진실로 믿고, 신실하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그런 사람은 자기가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이생에서 분명하게 확신하기도 하고,3)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소망은 결코 자기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4)
2 이 확신은 불확실한 소망에 근거한 추측과 가능성 뿐인 신념이 아니다.5) 다만 믿음의 절대적인 확신은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거룩한 진리에 기초하며,6) 그 약속들로 주신 은혜의 내적 증거,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과 더불어 입증하시는 양자의 영의 증거에 기초한다.8) 이 성령은 우리가 받을 기업의 보증이신데, 그분에 의하여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9)